<걱정 말아요 그대> 전인권 작사, 작곡, 노래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를 아내와 함께 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아내는 손수건을 건넸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가 없었다.
1990년 1월 말, 당시 집권당인 민정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의 3당 야합이 선언되었을 때, 시민단체에서 3당 야합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준비했었다.
그 대회에 당시 통일민주당 소속이었지만 3당 야합에 반대하고 소위 꼬마 민주당에 남았던 노무현 국회의원을 연사로 초청하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를 만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의 보좌관으로 있던 선배와 약속을 하고 마침 부산대학교 운동장에서 열리고 있던 부산 민중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대구 대회에 연사로 초청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선배에게 꺼내자 선배는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라며 "노무현은 이미 우리가 생각하는 노무현이 아니라 정치인이야."라며 손사래를 치고는 고개를 저었다.
선배의 뜬금없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잠시 후에 알게 되었다. 노무현 의원은 연설하는 동안 계속해서 3당 야합의 주역인 김영삼을 총재님이라 불렀고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노무현 의원과 함께 3당 야합을 반대한 김정길 의원이 연설에서 그가 총재님이라 부를 때 야유를 보내던 때와는 달리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연설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온 그에게 만나러 온 이유를 설명하자 그는 단호하게 못 간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운동권이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냥 썩은 빗자루 몽둥이처럼 쓰다가 버리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라며 화를 내었다.
하지만 그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묻기에는 실망이 너무 컸었다. 그와 함께 싸웠던 날들이 너무 허망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난감해하는 선배를 뒤로하고 대구행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일주일 뒤 노무현 의원의 비서가 사무실로 찾아와 사과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민중대회의 연사는 정해져 있었고 우리는 그의 사과를 받지 않았다.
그 이후 오랫동안 노무현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을 했다. 특히 그가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는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변명으로 변절을 하고 반대진영에서 홍보물을 만들기도 했다. 노무현에 대한 반감은 그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사실 보수 진영뿐만 아니라 진보진영의 많은 이들조차도 노무현을 비판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 비판의 중심에는 늘 진영논리가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것은 그런 진영 논리에 기댄 자신 때문이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자신에게는 얼마나 관대하고 상대에게는 얼마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던가? 그의 죽음 이후로 오랫동안 이런 부끄러움에 시달렸다. 생각해보면 노무현은 시민(대중)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그들과 함께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진보진영은 늘 대중의 이해와 요구라는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대중을 이해하거나 함께 하지 못했다. 6.29 선언이라는 작은 승리에 취해 있었고 진보라는 울타리가 가진 한계를 마치 금기인 양 넘지 않으려 노력했었다. 아니 오히려 그 울타리 안에서 작은 차이를 커다랗게 만들고 서로에게 칼날을 들이대면서 서로가 옳다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결국 시민단체를 떠났다. 그
때 가장 아팠던 것은 밥을 굶거나 잘 곳이 마땅하지 않았던 경제적 고통이 아니라 동지라는 이름 아래에서 세상을 바꾸겠노라 맹세했던 서로를 질시하던 견딜 수 없는 시선 때문이었다. 이제 와 그 어떤 말로도 자신의 비겁과 변절을 변명할 수 없음을 잘 안다. 그리고 변명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영화를 보던 내내 그에게 용서를 구했다. 지난날, 그의 실수를 나는 침소봉대했고 그의 항변이 거짓이라고 외면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내 못난 삶의 작은 가림막이 되어줄 것이라는 비겁한 생각을 했었다.
가혹하게도 나는 그의 일순간 잘못에만 집중했고 심지어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과 함께 맞장구를 쳤다. 대중의 힘을 믿었던 그를 조롱하는 것을 묵인하고 당연하다 여겼다. 부끄러웠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에 불이 켜졌을 때, 아내는 아무런 말없이 손을 잡았다. 오랫동안 떨쳐버릴 수 없는 이 부끄러움을 아내는 알고 있었다. 이제는 그만 잊어라고, 다들 그렇게 살지 않느냐? 그래서 더 선하게 세상에 헌신하고 살아가면 되지 않느냐는 야내의 마음이 전해져 왔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 날, 봉화마을에 다녀왔다. 늦은 오후였지만 그의 묘소는 그를 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흰 국화를 든 사람들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그에게 용서를 빌었다. 너무 늦게 구하는 용서는 아니었을까? 그는 아무런 말 없이 웃고 있었다. 마을 어귀를 돌아 나오는 길에 영화 <무현>의 Original Sound Track “걱정말아요 그대”가 흘렀다.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우리 함께 노래합시다/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그런 의미가 있죠/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새로움을 잃어 버렸죠/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그런 의미가 있죠/우리 다 함께 노래 합시다/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걱정말아요 그대 가사)
들국화 밴드의 전인권이 2004년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 만들었다는 노래는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개인을 넘어 다시 시대를 노래하고 있었다. 자전거에 손녀를 태우고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논길을 달리던 그의 모습이 그렇게눈물겨웠던 것은 가난한 이의 벗이 되고 싶었던 바보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했고 오히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공범이 되었던 못난 슬픔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