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위의 마지막 일곱 말씀> 하이든,
오래전에 열여덟 살 된 소년 사형수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4개월 가까이 함께 산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두 건의 살인을 저지른 죄로 1심 재판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그 친구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거의 말을 놓았다. 특히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적대감이 심해 걸핏하면 “데모하는 놈들은 다 죽여야 한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재소자들은 사형수라는 이유 때문에 되도록 그를 조심했고 교도관들은 내심 골치 아픈 운동권 학생을 다루는데 호재라도 만났다는 듯이 바로 옆방에 배치하면서 비열한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교도관들의 의도와는 달리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아주 가까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0.65평밖에 되지 않는 독방 생활은 면회가 제한되어 있었고 온종일 볼 수 있는 것이라곤 가끔 변기통을 통해 얼굴을 내미는 쥐들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마저도 작은 인기척에 놀라 달아나 버리고 나면 격자무늬 창살을 따라 들어온 햇살을 따라 겨우 몸을 움직이는 것이 일상인 하루였다. 그런 상태에서 비록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말벗이라도 되어 주고 하루에 10분 남짓, 손바닥만 한 운동장에서 유일하게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였기에 가까워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 그 친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열여덟의 나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형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친구는 항소 이유서를 써 달라며 자신의 공소장을 건넸다. 당시 교도관들의 눈을 피해서 가끔 가난한 재소자들의 법률대리인 역할을 해주곤 했기 때문에 많은 공소장을 볼 수 있었지만, 그 친구 공소장을 보고서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런 살인의 이유도 없었고 또 그 방법이 너무 잔인해 과연 이런 친구의 죄를 감해달라고 재판부에 항소 이유서를 쓰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선배들은 철학적 범주의 문제를 말하면서 사회적 문제와 인간의 본성을 구분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구분될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고민 끝에 쓴 항소 이유서가 판사를 움직이지 못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판사는 이런 범죄를 용서할 수 없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결국 그 친구는 항소심에서도 사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대법원에 상고하는 길 밖에 없었고 상고에서 형이 감형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재소자들 대부분은 알고 있었다. 그는 며칠간의 고심 끝에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다. 그리고 다른 사동으로 이감을 가기 전에 운동장에서 “무기징역을 받아 20년만 살고 모범수로 나가면 세상이 깜짝 놀랄 범죄를 저지르고 싶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는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며칠을 심하게 앓았다. 도대체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온몸을 찔렀다. 어쩌면 선의라는 이름으로 행한 행동이 세상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 왔을지도 모른다는 죄의식에 몸을 떨었다.
이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지금이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묵상하고 그 의미를 통해 인류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사순 시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작곡가가 교회의 의뢰를 받아 사순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작품을 썼다. 그중에서 하이든이 작곡한 <십자가 위의 마지막 일곱 말씀>은 성경의 네 복음에 씌여진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증언하는 곡으로 예수의 일곱 말씀에 따라 일곱 개의 곡과 도입부, 마침부로 극적인 효과를 더해 모두 9곡으로 구성된 불후의 명곡이다.
하이든은 맨 처음에 이것을 관현악곡으로 작곡했고, 곧이어 현악 4중주를 위해 편곡했으며 9년 후에는 오라토리오 판으로 확대했다. 그는 이 곡에서 신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로서 예수의 불안과 두려움, 절망, 슬픔, 용서와 사랑, 평온을 노래한다.
그는 어쩌면 이 곡이 예수가 실천한 사랑이 단순히 그리스도교인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까지 전해지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도입부에 이은 두 번째 곡인 첫 번째 말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는 최근 관제 집회에서 십자가를 들고나와 폭력을 선동하는 무리에게 전하는 예수의 절규 같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곡이 대단히 뛰어난 작품이기는 하지만 전곡을 듣기에는 많은 인내가 따른다. 그런 의미에서 후에 다른 사람이 편곡하고 하이든이 승인한 피아노 버전은 좀 더 대중적이다. 특히 헝가리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예노 얀도(Jeno Jando)의 연주는 비록 저가 레이블이긴 하지만 귀한 음원을 찾아내는 낙소스에서 출판된 것이기에 더욱 가치를 더한다.
징역을 살고 나온 2년 뒤에 그 친구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었다. 죽음의 순간, 그는 예수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 두 죄수 중에 어느 쪽이었을까? 끝내 예수를 조롱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던 죄수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새로운 삶을 찾았던 죄수였을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물음은 304명의 희생자를 낸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자들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용서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에게 용서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어쩌면 예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며 죄의 용서를 외치고 있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칠지 모른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