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을 꿈꾼 적이 있었습니다.
글의 힘을 믿었고 그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해서 공대를 포기하고 문학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은 글을 배우는 곳이 아니더군요. 대학은 그저 장사치들의 놀이터에 불과했고 진리는 교내에 상주하는 경찰들의 폭력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부질없다는 것을 느껴가고 있을 무렵 정말 불현듯 야학이 다가왔고 그 야학에서 대학 4년을 다 보냈습니다.
가난 때문에 학교를 가지 못하던 아이들은 제 작은 누님의 모습이었고 차마 가슴에 다 담지 못할 정도로 아팠습니다.
그렇지만 딱 그까지였지요. 저보다 나이가 더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었을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글이 아니라 힘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데모를 선택했고 그 결과는 제가 가르치던 아이들이 저를 걱정해 면회를 왔지만 그 면회조차도 막아섰던 독재의 폭력 때문에 흘려야 했던 눈물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도서관에 나와 화분에 물을 주면서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빛나던 젊은 날의 신념은 유효기간이 지난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어제는 한 아이가 도서관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난 뒤에 장에 있는 과자를 통째로 가방에 넣어 가려다 다른 친구들의 만류로 가져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찬찬히 타이르긴 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친구들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심을 타일러야 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행여 제가 한 말에 아이가 상처를 입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집에 돌아와 오랜 시간 생각을 하고 또 했습니다.
가끔은 친구가 되어야 하고 또 가끔은 어른이 되어야 하고 또 가끔은 부모가 되어야 하는 이 일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일까 싶어 종일 우울한 날입니다.
이번 주는 성당의 첫 영성체 준비 때문에 여러 명의 친구들이 시 쓰기 시간에 오질 못했습니다.
저처럼 믿음이 부족한 가짜 신자에게도 첫 영성체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 제 지인들에게, 혹은 아이들에게도 "예수를 믿지 마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의지하는 것은 우상을 믿는 것이고 자신을 비루하게 낮추는 것이라구요.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정신을 믿을 때 그 믿음은 올바른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모든 종교의 뿌리인 평등이라는 대 전제 하에 우리는 함께 해야 하는 것이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불온한 시대, 불온한 마음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인간이며 그 인간의 회복이야말로 마을교육공동체가 가야할 길이기도 합니다.
친구
서나래(백운초 5).
친구는 가족은 아니지만
나와 피가 섞여 있진 않지만
가족같은 사람이다
*어제는 나래가 도서관에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왔습니다. 수학이 어렵고 하기 싫지만 도서관에서 수학을 스스로 배우고 싶다고 한 친구입니다. 나래는 붙임성이 좋고 활달해 많은 친구들이 나래를 좋아합니다. 나래는 그런 친구들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은 친구를 많이 만나는 것은 스스로 좋은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나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친구
김유현(용산초 5)
나는 연필
친구는 지우개
* 연필과 지우개를 빗대어 친구를 표현한 유현이의 솜씨에 놀랍니다.
어쩌면 내가 잘못한 것을 지적하고 고쳐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좋은 친구이겠지요.
유현이의 시적 재능은 이런 작은 생각이 모여 만들어집니다.
삼각 김밥
임연우(오륙도초 2)
참치마요, 스팸삼각 김밥, 불고기 삼각 김밥
난 참치마요가 좋아
참치가 맛있으니까
*삼각 김밥에 이런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연우는 시 쓰기 시간에 이제 조금씩 적응하고 있습니다.
비록 2학년이긴 하지만 4학년 언니들이나 3학년 언니들과 함께 맞춤법도 풀어가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곤 합니다.
연우에게 시가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될 때 시 쓰기 시간은 그야말로 재미있는 시간이 되겠지요.
오므라이스
김윤하(발도르프 3)
난 오므라이스를 너무 좋아해
한 입 넣으면 음~
입 안 가득 계란 맛이 퍼지고
참깨 같은 고소한 맛이 퍼지지
나는 오므라이스가 좋아
*참 이쁘지요. 윤하의 고운 마음이 환하게 다가오는 그런 시입니다.
맞춤법을 어려워하던 윤하가 이제 시를 아무런 부담 없이 쓰게 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칼 마르크스가 17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쓴 논문 "직업 선택을 앞 둔 한 젊은이의 성찰"이라는 논문을 서른이 다 되어서야 읽고 느꼈던 그 충격은 실로 충격과 참담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가 "그 누가 뭐라해도 인류를 위한 직업을 선책하겠다"는 논문의 말미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아이들의 생각을 키워주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기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 쓰기 시간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초밥
이서영(용당초 3)
초밥은 맛있다
나는 새우 초밥, 연어 초밥이 맛있다
초밥을 먹으면 기분이 좋다
*서영이는 아직 비유를 익히지 못했습니다. 그냥 자신의 생각을 적고 있지요. 서영이가 비유를 경험할 때 또 다른 시가 나타나겠지요.
서영이가 낯선 친구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면서 곧 서영의 시에도 뛰어난 표현력이 나오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라면
황지유(운산초 3)
후루룩 후루룩
맛있는 라면
언제나 머고 싶으면
쉽게 먹을 수 있다
먹고 나면
또 먹고 싶은
맛 있는 라면
* 조심스럽긴 하지만 지유의 시는 약간 고쳤습니다. 아이들이 쓴 시를 되도록이면 고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문맥이나 내용에 따라 약간의 수정을 하면서 고민을 합니다.
지유의 표현이 살아있는 한에서 가장 지유의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는 표현으로 살아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친한 친구
유은별(용산초 3)
친구
그 중에서도 친한 친구
예진이, 세이
친한 친구
그 중에서도 제일 친한 친구
음!
세이와 예진이
둘 다 제일 친한 친구
친구
친한 친구
제일 친한 친구
* 은별이의 시를 자세히 보면 행과 연, 또 그 사이에 단어를 배치하는 능력을 눈여겨 보게 됩니다.
친한 친구, 제일 친한 친구는 같은 말인 듯 하지만 고민의 흔적이 보입니다.
지금도 좋지만 아마 은별이는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쓰게 된다면 멋진 시가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친구
하은성(운산초 5)
친구는 너무 좋은 존재다
친구는 좋다
그런데 친구는
나랑 노는게 좋을까?
* 지난 번에도 말했지만 은성이에게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물론 시 쓰기 시간이 즐겁긴 하지만 논리적인 역사나 과학을 좋아하는 은성이에게 시 쓰기는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직설적이든 아니면 논리적이든 그것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이가 들면 알게 되지요. 은성이는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충분히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겁니다.
친구
배예진(용산초 3)
친구는 재미있다
친구가 없으면 재미가 없다
친구는 소중하다
* 시 쓰기 시간이 여전히 낯선 예진이가 보이지요. 우리가 무엇을 배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낯설고 서툰 시간은 있기 마련이지요. 이 시 쓰기 시간은 평가를 해서 등수를 매기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해서 예진이도 곧 시 쓰기 시간의 의미를 알고 좋은 시를 나누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콤파스
송채린(백운초 4)
콤파스는 동그란 원을 그린다
손으로 그린 원은 삐뚤삐뚤
이상한 동그라미가 나온다
그러면 나는 콤파스로 그린다
와!
아주 동그란 원이 그려졌다
저울
무게를 잴 때 쓰는 저울
저울은 종류가 많다
저울은 그냥 저울인데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양팔 저울, 전자 저울, 대 저울, 웟 접시 저울......
*채린이는 3주 전부터 학원 시간 때문에 시 쓰기 수업을 오지 못합니다. 하지만 늘 학원이 끝나면 행여 시 쓰기 시간이 끝났을까봐 숨을 가쁘게 몰아 쉬며 달려와 친구들을 만나곤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시 두편을 써 왔습니다. 가슴이 저렸습니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채린이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훌쩍 채린이가 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들의 커버린 생각만큼 시를 함께 생각하는 저의 마음도 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콤파스와 저울이라는 시를 보면서 주변의 사물을 관찰하고 표현하는 채린이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납니다. 고맙습니다.
마니또
박시연(백운초 4)
내 마니또는 누굴까?
맨날맨날 챙겨주는
좋은 내 마니또는 누굴까?
성별은?
성씨는?
글씨가 예쁘네
오늘도 빨간 볼펜이 예쁘다
* 시연이의 마니또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특히 마지막 두 행은 도저히 초등학생이 쓴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만큼 반전의 표현이었습니다. 시연이가 마니또를 기다리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그 두 행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제 개인적 주관일지 모르지만 그 두 행을 통해 저는 적어도 이 시의 완성도를 보았습니다. 시연이가 좀 더 많은 생각의 깊이를 키워나가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브라우니 요리
김민지(백운초 4)
오레오를 부수고
우유를 넣은 후
전자레인지에 넣고 기다린다
조금 후에
전자레인지에서 뜨거운 브라우니를 꺼낸 후
냉장고에 넣고 5분을 기다린다
요리는 기다림이 많지만
난 요리가 좋다
*오랜만에 민지다운 이야기가 있는 시를 봅니다. 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은 기다림이 많은 요리라는 행에 있습니다. 기다림을 인내할 줄 아는 민지의 요리에 대한 사랑이 듬뿍 묻어나는 시를 읽으면 행여 제가 민지가 시에 대해 시들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했던 의구심을 싹 떨쳐버렸습니다.
딸기
서예림(백운초 4)
새콤달콤 딸기
새빨간 딸기
그래서 나는
딸기가 좋아
쌍둥이
세상에서
가장 사이가 좋은 쌍둥이
사이좋게 지내다가도
티격태격 한다
그러다 화해하면
다시
포도 알갱이처럼
사이좋은 쌍둥이
내 친구들 중에도
쌍둥이가 있지
*예림이의 시 쌍둥이 속에 포도 송이라는 표현은 아주 훌륭합니다. 그리고 친구 중에 쌍둥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관찰한 예림이의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시를 쓸 수 있기도 하구요.
짧은 시간에 시를 쓰게 하는 것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시를 쓸 때의 순발력을 기르는 의미도 있지만 평소에 사물에 대한 생각을 키우기 위한 작은 의도가 있기도 합니다. 자신이 보는 모든 사물과 사건을 허투루 보지 않을 때 생각의 깊이와 넓이가 커지는 것이지요.
구운 달걀
이서은(백운초 4)
구운 달걀은 맛있다
소금에 찍어 먹으면
짭쪼름 하니 맛있다
구운 달걀은
나도 모르게
고소한 맛에 중독된다
산
산을 오르면
숨이 차, 헉헉
비만이라 그런지
힘이 더 든다
하지만
상쾌한 공기가
나를 달랜다
* 서은이의 시를 읽으며 많이 웃었습니다. 서은이는 예의가 바른 친구입니다. 하지만 당당하지요. 그런 서은이가 쓴 두 편의 시에는 서은이의 작은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그다지 비만인 것 같지 않은데 아마도 친구들에게는 그것이 마음의 부담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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